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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현 개인전 <낙원으로>   2 channel video installation _ 20min _ 2018 

 

유은순(미학)

 

첫 번째 개인전 <공원생활> 이후 약 2년 만에 선보이는 문소현의 두 번째 개인전 <낙원으로>에서 작가는 그동안 해왔던 핸드퍼펫을 이용한 스톱애니메이션 작업을 내려놓고 주변으로부터 영상을 채집하면서 편집과 음향효과에 보다 집중한다. 형식은 다소 달라진 듯 보이지만 일상적인 사물이나 행위를 비틀어 낯설게 보이게 만드는 미감은 유지하면서도 이전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이자 작품 제목인 <낙원으로>는 두 개의 영상이 서로 마주 보도록 설치된다. 첫 번째 영상인 <낙원으로 – 빛나는 밤>은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에서 천국을 장황하게 묘사하는 부분을 낭독하는 목소리를 배경으로, 각종 빛 축제와 이벤트, 관광명소에서 수집된 영상이 나온다. 이 작품과 마주하여 흰 천 더미에 영사되는 두 번째 영상 <낙원으로 - 순한 짐승>은 각각 얼굴, 양팔, 몸체와 같이 매핑된 화면에 섹스토이, 액체괴물, 분재, 매직샌드, 수석, 잠자는 강아지 인형, 비닐 등이 조합되어 상연된다. 심장이 뛰는 듯한 모습이나 합창하는 모습, 나무로부터 체액이 늘어지는 모습이 서로 다른 물질들과 조합을 이루며 프로젝션된다. 

 

두 개의 영상은 욕망에 대한 것이다.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 아니 애초에 욕망이란 무엇일까. 문소현이 잠정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이성 중심의 구조화된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다. 이는 초기 작품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문제의식이다. 2007년 스톱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빛의 중독>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빛을 피하고 도망치다 결국 그 자신이 움츠려 만들어낸 작은 그림자에 숨어 잠깐 휴식을 취한다. 여기서 빛은 일종의 빅브라더로서 주인공을 감시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은유이다. 요컨대 빛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삶과 태도를 규정짓는 외부의 힘이고, 주인공은 이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2016년 제작된 스톱모션애니메이션 <공원생활>은 공원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인 지점들을 포착한다. 공원은 노동과 의무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다. 작가는 그러한 장소에서조차 실상은 공중도덕과 공원개발계획으로 인해 구조화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줄 서서 닭에게 모이를 주는 사람, 화살 없는 활시위를 반복해서 당기는 사람, 수풀 속에서 무언가를 훔쳐보는 사람 등 욕망의 해소가 불가능해짐으로써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행동들이 작품에서 재현되었다. 

 

2018년 <낙원으로>는 다시 욕망에 주목한다. 각각의 영상은 서로 다른 욕망에 대해 재현한다. <빛나는 밤>은 ‘보는 것’의 욕망을, <순한 짐승>은 ‘감각하는 것’의 욕망을 의미한다. 두 영상은 처음과 끝이 동일한 이미지로 구성되는데, 이는 두 개의 다른 욕망이 원래는 같은 뿌리-앞서 언급한 근원적인 욕망-를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시각과 신체의 분리된 욕망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각과 신체의 분리 자체가 인간이 현대 사회와 같이 구조화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은 욕망의 성취가 아닌 욕망의 실패를 다룬다.

 

우선 <빛나는 밤>을 보자. 영상에 등장하는 각종 빛 축제와 프로젝션쇼는 우리가 익히 보아온 도시인들의 여가거리이다. 나무와 수풀, 인공조형물에 각양각색의 전구들로 치장되어 인공의 빛 정원을 조성한다. 매해 연말이 되면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빛-수목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깜깜한 어둠 사이에서 건물의 실루엣을 알려주는 건 24시간 내내 켜져 있는 빌딩의 창문이듯, 어둠 사이에서 수목과 인공조형물의 실루엣을 전구들이 밝힌다. 전자가 노동의 상징이라면 후자는 여가와 휴식의 상징이다. 도시인들은 자연에서도 어둠을 거부하고 빛을 찾고자 한다. 각종 축제와 이벤트는 도시인의 삶을 상징하는 빛을 노동과 관계없는 자연물을 장식하는 빛으로 탈바꿈함으로써 잠시나마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질 낮은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미적 경험의 질 저하는 문소현이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 중 하나이다. 욕망의 완전한 해소가 최고의 미적 경험이라면, 욕망의 불완전한 해소는 질 낮은 미적 경험이자 가짜 경험이다. 이는 2016년 <공원생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공원이라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장소에서 휴식마저 공원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각종 축제와 이벤트, 관광명소는 지자체의 조악한 계획에 따라 휘황찬란하게 겉모습을 치장하지만 내용은 텅 비어있고 또 다른 규칙과 행동 양식을 요청한다. 구조화된 휴식은 또 다시 욕망을 불완전하게 해소시킬 따름이다. 

 

<빛나는 밤>에 나레이션 되는 <실낙원>의 천국에 관한 묘사는 ‘보는 것의 욕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천국은 “벽옥의 바다처럼 빛나는 포석”과 “하늘의 장미”,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에 박힌 “찬란한 보석들”, “영광과 빛과 기쁨으로 가득 찬 거룩한 곳”으로 묘사되며 대부분이 빛과 시각과 관계한다. 청각과 후각적인 묘사가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이들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 장치로 등장할 뿐이다. 존 밀턴의 <실낙원>은 종교적 서사를 통해 개인의 이성과 정치성의 확립을 도모하는 계몽주의 서사시이다. 계몽주의 이후 시각은 이성의 명료성을 뜻하며, 어둠은 무지를 뜻했다. 따라서 <실낙원>이 천국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상당히 할애되고 있는 점은 무척이나 당연해 보인다. 천국에 대한 묘사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영상은 과연 그 장소들이 도시인들의 낙원(樂園)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빛나는 밤> 맞은 편에 위치한 <순한 짐승>은 사람들이 촉각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는 장난감, 도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천더미에 거칠게 매핑된 영상들의 조합은 조각난 신체들이 다시 합쳐진 인조인간으로 보인다. <순한 짐승>은 부드러움, 끈적끈적함, 성적 쾌락 등 특정한 촉각을 위해 인공적으로 제작된 각종 사물들을 모두 뭉쳐낸 감각적 욕망의 덩어리이다. 이것은 대상만 존재할 뿐 주체가 없고 대상의 총합이 일종의 주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 덩어리는 분리되어 있고, 스스로 감각을 추구하기 위한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감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욕망할 수 없고 욕망될 뿐인 기계이다. 따라서 감각에의 욕망은 실패한다.

 

한편 <순한 짐승>은 마치 <빛나는 밤>의 관객같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신체는 있지만, 눈이 없다. 눈이 가끔 등장하기는 하지만, 신체 가장 하단에 위치한 발에 붙은 눈이기 때문에 무엇을 볼 능력이 없다. <빛나는 밤>이 시각적 욕망을 다루지만 이를 보는 제 1의 관객은 그것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순한 짐승>은 시각적 욕망의 실패를 예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한편 <순한 짐승>은 관객을 또한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의성 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대상들의 집합이자 전혀 유기적이지 않은 어떤 것의 더미에 불과한 눈 없는 신체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관객은 거북함, 약간의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일시적인 욕망의 해소를 위해 이용했을 장난감, 도구, 인형, 취미들이 주체를 향해 있을 때,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일순간 역전되기 때문이다. 

 

온갖 아름다운 인공 빛 정원과 축제, 프로젝션쇼를 모아놓은 <빛나는 밤>과 촉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대상으로 버무려진 <순한 짐승>은 애초에 욕망의 대상이 잘못 설정되었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현시대의 욕망 구조를 재현한다. 욕망의 근원까지도 해소할 수 있는 곳이 낙원(樂園)이라면 문소현에게 현시대는 그 모든 욕망의 해소 통로가 차단된 낙원(落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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